호수로 난 길

호수로 난 길

어느 새 시월은 깊어 온 땅과 온 하늘에 가을색이 짙게 흩날리고 있다.
시월을 지나칠 수 없는 나의 방랑은 또 다시 기꺼이 길을 떠나는 채비를 서두른다.
가을이 깊은 곳으로 다다르기를, 그 곳에서 진하게 가을 물이 배어들기를 소원하며 짐을 꾸린다.
Oregon주 곳곳에 흩어져있는 호수들을 만나러 가려는 길이다.
널리 알려진 곳도 찾겠지만 인적이 드문 숨은 보석같은 호수를 만나 그 파란빛에 나의 삶을 투영할 수 있기를 바라며…

짙은 그림자처럼 누워있는 이른 새벽의 어둠을 차의 헤드라이트로 잘게 부수며 북으로 길을 달렸다. 조금씩 물러나는 고요, 길은 새벽을 이끌고 나는 늘 다니던 곳처럼 익숙하게 새벽길을 달렸다.
북쪽으로 한 네시간을 달려 처음 만난 호수는 Shasta Lake이다. 아직 켈리포니아를 벗어나지 않은 켈리에서 가장 큰 호수이다. 동이 터오는 아침의 호수는 신비한 기운을 내뿜고 있어서 나라는 작은 존재는 어디에 숨은듯 보이지도 않았다.


잠시 머문 후, 5번 국도를 벗어나 97번으로 길을 바꿔 달려서 Klamath Lake로 향하는데 반짝이는 호수와 나란히 달리는 길이 한참 이어졌다. 호수를 따라 난 길, 그 길을 따라 가다가 잠시 멈춘 곳에서 간단한 아침식사와 커피을 마시며 호숫가의 쉼을 가졌다.

다시 북쪽으로 드디어 Crater lake이다.
미국의 호수 중에서 가장 수심이 깊다는 호수, 파랗다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되는 깊고 짙은 파랑의 결정이었다.
그냥 아~~ 한숨같은 탄성으로 첫대면의 순간을 맞았다.
흘러드는 강줄기도 없이 겨울에 쌓이는 눈만으로 이렇게 깊은 호수를 만든다고 한다. 7000여년 전의 화산폭발로 생긴 분화구에 눈으로 메워진 호수라고 한다. 감은 잘 잡히지 않지만 눈 앞에 진실은 기적이었다.


호수를 가장 넓게 볼 수 있다는 3.4마일 코스의 Garfield Peak Trail은 왕복 두시간이 예정이었는데 돌아와 시간을 보니 장장 세시간이 걸렸다.
호수를 둘러싼 가파른 산길을 헐떡이며 오른 후 그 정상에서는 잔잔한 호수의 물결을 살피며 나른해지는 마음을 나무 밴치에 누일 수 있어 좋았다. 하늘과 호수의 빛을 서로 엮으며 짙게 스며드는 가을빛에 취하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Crater lake 옆에 있는 또 다른 호수, Diamond Lake까지 마저보고 첫밤을 보낼 숙소로 향했다.

이튿날은 아주 많은 호수를 만났다.
어느 싸이트에서 본 ‘오레곤의 15개 호수”, 거기에 best가 덧쓰여진… 중에서 6개의 호수를 다 내 것으로 만들었다. Crescent lake, Odell lake, Waldo lake, Paulina lake, East lake 그리고 Sparks lake이다.
그 외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말라버린 Salt Creek Lake도 보았다..

길은 호수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나는 호수로 난 길 위에서 서두르지도 않았고 수고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을빛을 쫓아 앞으로 나아가면 호수는 눈 앞에 펼쳐젔다. 오래 전 그 언젠가 누군가 나를 위해 만들어놓은 것만같은 고마운 길에는 가을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Chiloquin, Chemult, Bend라는 낯선 곳에서 하루를 쉬어가며 Lake billy chinook, Trillium lake 그리고 Lost lake을 둘러보았다.

호수를 마주하고 그 깊은 푸르름에 젖어 시간을 잃고 앉아 있으면 어느새 속삭이듯 다가오는 은사시나무잎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노란색 고운 빛에서 쏟아내는 추억같은 소리에 무거운 가슴은 날개를 달아 나르고 묶여진 일상은 산산히 흩어지고만다. 호수와의 만남이 하루하루 늘어갈수록 나의 발걸음은 더욱 가벼워졋다.

포틀랜드로 가는 84번은 콜럼비아강을 따라가는데 절경인 가을단풍으로 유명한 곳이다.
노랗게, 노랗게 더 노랗게 길은 달릴수록 더 선명한 노란빛으로 가을이 배어들어 있었다.
Multnomah Falls와 몇개의 작은 폭포들과 미국에 있는 많은 일본 정원 중에 제일 아름답다는 포틀랜드의 일본정원의 고운 단풍과 Sauvie island는 할로윈 언저리였던 때라 그곳의 유명한 호박패치는 덤으로 얻은 가을걷이였다.
출발하던 날 헤어졌던 5번을 다시 만나는 Medford에서 마무리 여정을 준비하였다.
Rogue강을 거슬러 올라서 산 속으로 들어가 계곡과 작은 폭포들 그리고 숲을 담아왔고 애쉬랜드의 빨간 단풍과 이른 낙엽으로 찬란했던 숲에서는 단풍과 낙엽을 같이 즐기며 지난 날들과 화해하는 마음을 얻을 수도 있었다.

지치고 해메이던 일상에서 길을 잃었다고 느끼며 떠난 길에서 나는 길을 찾는다.
길은 어디론가 이어졌고 그 길을 따라 금빛으로 빛나던 가을이 몇날 몇일이었던가.
혼자 즐기던 풍성한 금빛의 호사, 그 화려했던 시간들로 나의 가을과 다가올 겨울은 나를 품었던 그 호수처럼 충만하고 그로 인해 힘찬 걸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낼 것이다.

윤 혜석 시인 작가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