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병장수라는 말이 있듯 우리는 질병이 없어야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중년 이후 몸 어딘가가 아프기 시작하고 질병에 걸렸다고 진단받으면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인지 중년 이후 고혈압, 당뇨병 등 평생을 안고 가야 하는 만성질환을 진단받은 많은 환자가 자신의 신체 상태를 인정하지 않고, 일시적으로 식사조절이 되지 않았거나 체중이 늘어서 나타난 결과라고 무시하려 한다. 우리가 장수를 하려면 질병을 앓지 않아야 하는 것일까?
장수 연구가 보스턴의대 토머스 펄 교수의 2003년 97~119세의 장수 노인 424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장수 노인의 약 38%는 80세 이전에, 또 다른 43%는 80세 이후에 고혈압, 당뇨병, 골다공증, 파킨슨병, 심혈관질환, 뇌졸중, 암 등을 진단받았다. 장수 노인 중 19%만이 별다른 노인성 질환 없이 소위 무병장수를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의 장수 노인 대부분은 병에 걸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병과 함께 ‘유병장수’하는 사람들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유병장수할 수 있을까. 좋은 유전적 특성을 타고나 병에 걸렸을 때 회복이나 치유 자체가 수월한 사람도 있지만, 정신적인 강함 역시 매우 중요하다. 실제 암이나 심뇌혈관 질환과 같은 위중한 병 앞에서도 현실을 담담하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필요한 치료를 하나씩 착실히 해나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작은 병 앞에서도 계속 낙담하고 현실을 부정하며 치료에도 소홀한 환자들이 있다.
이러한 환자들은 과거보다 훨씬 발전한 의학기술이 있음에도 막연한 두려움 속에 온전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자칭 전문가의 검증되지 않은 건강 정보에 현혹될 위험에 노출된다. 미디어 매체, 인터넷 등을 통해, 혹은 주위에서 효과를 봤다는 막연한 전언을 통해 보다 편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민간요법 등에 관심을 가지고 소위 골든타임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건강 비법이 있을 리 없다는 현실을 자각해야 한다. 실제로 그런 치료가 효과가 있다면 관련한 의학적 치료나 약이 개발되지 않았을 이유가 없다. 심지어는 근거 없는 민간요법을 믿게 하고자 의사가 환자의 병을 키우기 위해 민간요법을 배척한다는 황당한 음모론까지 주장하고, 이를 맹신하는 사람들도 있다. 마음이 약해진 틈을 타고 들어오는 유혹을 뿌리치고, 꾸준한 치료와 건강한 생활습관 유지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노인성 질환을 진단받은 것을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계기로 삼는다면 더욱 좋다. 오랫동안 자신의 몸과 건강을 살피지 않고 살아온 건 아닌지 돌아보고, 건강하게 먹고, 운동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등 건강을 위해 노력하면 병에 걸리기 전보다 전반적인 건강수준이 훨씬 좋아지게 된 사례들도 볼 수 있다. 마음가짐 하나의 차이로 절망이 희망이 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혈압과 당뇨병, 암 등 병이 없다면 오래 살 수 있지만, 오래 살려면 꼭 병이 없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장수인은 천운을 타고나 아무 데도 아프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질병을 잘 관리하고 이겨낸 사람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김광일 분당서울대병원 노인병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