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의탄생
KIST 초대 최형섭 원장은 미국을 돌며 젊은 과학자들에게 “조국을 살려달라” 호소했는데 연구 인력을 모으는 것도 한 편의 드라마였다.
초대 원장 최형섭은 미국을 돌며 한인 과학자들에게 호소했다. 그는 돈이 없어 허름한 숙소에 묵으며 조국의 젊은 과학자들의 손을 붙들고 호소했다. “가난한 조국은 당신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정성이 통했음인지 첫해인 1966년 18명이 귀국한 후 1990년까지 영구 귀국한 과학자가 1,000명을 넘었다.
귀국 과학자들은 당시 국립대교수 연봉의 3배를 받았지만, 그것도 미국에 있을 때의 절반이 안됐다.
그런데도 국내에서는 이들을 흘겨보는 이들도 많았다. 주로 서울대학교에 재직 중인 교수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귀국한 과학자들의 연봉이 월등히 높은 것을 알고 이런저런 경로로 문제를 제기했다.
논란이 일자 박 대통령은 그들의 급여 명세서를 훑어 보았다. 그 후 ‘이대로 시행하시오!’라고 지시했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이날 몇몇 과학자의 연봉이 일국의 대통령인 자신의 연봉보다 높은 것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대로 시행하라’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서울대를 비롯한 국립대 교수들이 제기한 ‘형평성 논란’은 잠잠해졌다. 부자 나라 미국에서 과학자들이 이렇게 유출된 역사는 없었다.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은 ‘한국의 젊은 과학자들이 세상에서 제일 부자 나라인 미국을 등지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KIST의 재미 한국인 과학자 유치는 세계 최초의 역(逆) 두뇌 유출 프로젝트다”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야말로 KIST를 살린 인물이라고 평했다. “대통령께서는 설립 후 3년 동안 적어도 한 달에 한두 번씩은 꼭 연구소를 방문해 연구원들과 대화를 나눠 연구소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주었고, 건설 현장에 직접 나와 인부들에게 금일봉을 주는 등 각별한 신경을 써주었다.”
박 대통령은 그뿐 아니라 국가기관의 부당한 간섭도 원천 예방해 주었다고 최형섭 초대 원장은 기록하고 있다. “청와대에서 열린 KIST 소장의 임명장 수여식에서 박 대통령은 ‘예산을 얻으려고 경제기획원에 들락 거리지 마라.’ ‘절대로 인사 청탁을 받아들이지 마라.’고 당부하셨다. 그것이 오늘의 KIST를 만든 원동력이었다.”
이렇게 어렵게 출범한 KIST는 국가 건설의 초석을 쌓았다. KIST의 시작은 미약하고 초라하게 출범했으나 그 KIST가 이 나라 과학의 근간이 되었고 기업의 두뇌를 산출해서 오늘의 IT 강국 대한민국을 탄생시켰다!
KIST는 1965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미국 린든 존슨 대통령이 발표한 ‘한국의 공업기술 및 응용 과학연구소 설립에 관한 공동성명’에 근거해 1966년 2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라는 명칭으로 설립됐다.
미국 정부는 당시 베트남전 파병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한국 정부에 1,000만 달러를 원조했다. 원조금의 사용처를 두고 복지사업, 산업체 지원 등 다양한 방안이 검토 되었지만 박 전 대통령은 “과학기술이 한국의 미래”라며 연구소 건립을 지시했다.
연우회 관계자는 “KIST가 설립된 1966년은 한국이 현대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나선 원년(元年)”이라며 “박 전 대통령은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과학대통령’이었다” 고 말했다.
이후 KIST는 국산 1호 컴퓨터, 자동차와 반도체 원천 기술 등을 개발하며 한국 산업과 과학계를 이끌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한국전자통신연구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등 20개가 넘는 대학·연구소도 KIST에서 탄생해 독립했다.
‘박정희’ 이분의 이름 석자와 그를 떠올리면 괜스레 눈가가 뜨거워지고 그리워진다! 마치 많은 이들에게
‘엄마가 마음의 고향’인 것처럼, 이분은 ‘나의조국 대한민국의 고향’인것 같다! <終>
글 <최형섭박사(1920~2004) >